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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정적자를 감당하지 않겠다는 선택

트럼프 정부가 재정적자를 줄이겠다고 말하면서도 AI 산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란과의 긴장 고조로 군사비까지 늘어나는 상황인데, 도대체 미국은 이 재정적자를 어떻게 감당할 생각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감당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확히는 갚아 나가는 방식이 아니라 분모를 키우는 방식으로 가겠다는 겁니다. 미국의 국가부채 비율은 현재 명목 GDP의 약 120% 수준으로, 지난 100년을 통틀어 가장 높은 상태입니다.

 

이걸 줄이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은 실질 성장과 인플레이션을 함께 올려서 GDP 자체를 키우는 것입니다. 그 성장의 핵심 동력으로 미국이 선택한 것이 바로 AI 산업입니다.

물가지표를 바꾸는 이유

케빈 워시 연준 이사 후보의 청문회 발언이 흥미롭습니다. 그는 기존 연준의 핵심 물가 지표인 코어 PCE 대신 절사 평균값(Trimmed Mean)이나 중앙값(Median)을 주목해야 한다고 언급했습니다.

 

코어 PCE는 1970년대 연준이 식료품과 유가 같은 변동성 큰 항목을 제외하고 만들어낸 지표입니다. 그런데 최근 데이터를 보면 코어 PCE가 전년 대비 3%인 반면, 절사 평균값은 2.3%, 중앙값은 2.8%입니다. 보는 지표를 바꾸기만 해도 인플레이션이 이미 안정권에 들어온 것처럼 해석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게 단순한 통계 이야기가 아닙니다. 지표가 바뀌면 금리를 내릴 수 있는 명분이 생깁니다. 케빈 워시의 논리는 지금 물가가 높은 이유가 수요 과잉이 아니라 공급 부족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금리를 올려 수요를 죽이는 게 아니라, 금리를 내려 기업들이 투자하게 만들고 생산성을 높여 공급 측면에서 물가를 잡아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그 생산성의 핵심이 다시 AI로 연결됩니다.

AI 산업은 지금 건설의 시간

현재 AI 산업에 투입되는 자금은 인플레이션을 조정한 실질 금액 기준으로도 역사상 어느 메가프로젝트보다 빠르게, 많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철도, 고속도로, 아폴로 프로그램, F-35 전투기 사업과 비교해도 6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투입된 금액이 압도적입니다.

 

그럼에도 아직 생산성이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걸 두고 거품이라는 시각도 있지만, 반대로 보면 생산성이 아직 안 나왔기 때문에 투자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기술 혁신의 순서는 대체로 이렇게 흘러갑니다. 자본이 먼저 들어가고, 그다음 노동 생산성이 오르면서 사람이 덜 필요해지고, 그 뒤에야 혁신이 가시화됩니다. 지금은 자본이 막대하게 투입되는 첫 번째 단계, 즉 건설의 시간입니다. 생산성이 나오기 전까지는 멈추지 않는 게 이 게임의 논리입니다.

국가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

이번 AI 사이클이 닷컴 버블과 다른 결정적인 차이가 하나 있습니다. 닷컴 시대는 민간 주도였지만, 지금은 빅테크, 금융 자본, 정부 세 주체가 함께 움직이고 있습니다.

 

칩스법이 그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정부가 1달러 보조금을 내놓으면서 민간에 나머지 9달러를 끌어오라고 하는 구조입니다. 정부가 방향을 정하고, 민간 자본이 따라 들어오는 이른바 국가 자본주의 방식입니다. 그리고 이 방향은 트럼프 혼자만의 결정이 아닙니다.

 

칩스법과 인프라 투자법은 바이든 정부 때, 리쇼어링 개념은 오바마 정부 때 시작됐습니다. 미국이 10년 넘게 준비해온 전략입니다.

은행 규제 완화도 같은 맥락입니다.

 

SLR 규제 완화를 비롯해 은행의 자본 보유 비율을 낮춰주는 정책들이 올해부터 발표되고 있습니다. 은행들이 더 많은 대출을 해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효과는 2027년 이후에 나타나겠지만, 방향은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스테이블코인이 금융 패권의 핵심인 이유

미국 국채를 사줄 주체가 줄어들고 있습니다. 중국을 비롯한 국가들이 미국채 보유를 줄이는 추세입니다. 그런데 정부가 계속 적자를 내고 부채를 발행하려면 누군가 사줘야 합니다.

 

여기서 스테이블코인이 등장합니다. USDT나 USDC 같은 스테이블코인은 발행할 때 담보로 미국 국채를 보유합니다. 전 세계 어떤 사람이 스테이블코인 1달러어치를 산다는 것은 간접적으로 미국 국채를 보유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냅니다.

 

스테이블코인이 전 세계로 확산될수록 미국채 수요가 늘어나고, 미국은 계속 적자를 낼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스테이블코인 관련 입법이 미국에서 초당적으로 진행되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건 암호화폐 업계의 이슈가 아니라 달러 금융 패권을 디지털 시대에도 유지하려는 국가 전략입니다.

산업 패권과 금융 패권, 그 끝에 서 있는 것

1940년대에 영국에서 미국으로 기축통화 지위가 넘어간 것은 산업 패권이 먼저 이동했기 때문입니다. 1등 제조 국가가 미국이 됐고, 2차대전 이후 막대한 부채를 짊어진 영국은 더 이상 파운드를 기축통화로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중국은 그 패턴을 정확히 공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 전 세계 GDP의 3%였던 중국 경제는 지금 17~18% 수준까지 올라왔습니다. 국제 스위프트 망에서 위안화 결제 비중도 5위권에 들어섰고, 무역금융 기준으로는 이미 세계 2위입니다.

 

일대일로 대출도 달러에서 위안화 결제로 점차 바꿔가고 있습니다. 미국은 지금 판을 흔들지 않으면 이 흐름이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AI로 새로운 산업 패권을 잡고, 스테이블코인으로 달러의 금융 패권을 디지털 영역까지 확장하려는 것입니다.

 

AI 산업이 생태계를 장악하는 쪽이 이깁니다. 생태계를 못 먹으면 무조건 밀린다는 것, 그것이 지금 미국이 이 속도전에서 멈추지 않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