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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새벽, 신이 넘은 사내 하나가 길 위에서 허리를 깊이 꺾습니다. 상대는 고작 여섯 살 된 꼬마입니다. 그런데 그 꼬마는 대답은커녕 거들떠보지도 않고 그냥 지나칩니다.
이 사내는 오늘 새벽에 소 한 마리를 잡았고, 하루 번 돈이면 시장에서 비단옷 열 벌도 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평생 비단옷을 입지 못합니다. 갓도 못 쓰고, 기와집에 살 수도 없습니다.
심지어 죽어서 상여에 실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습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 바로 조선의 백정이었습니다.
백정은 원래 백정이 아니었다
고려 시대에 백정은 나라에 세금 내고 군대 가고 자기 땅에서 농사 짓는 평범한 양인을 뜻했습니다. 우리가 아는 그 백정, 소를 잡고 가죽을 다루던 사람들은 원래 화척이라고 불렸습니다. 이 이름 뒤에는 낯선 이방인들의 얼굴이 숨어 있습니다.
삼국 시대 말부터 고려 초까지, 북방에서 물밀 듯 내려온 말갈과 거란 계통의 유목민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착 농경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무리 지어 강을 따라 떠돌았습니다. 사냥하고 짐승 잡고, 버드나무 가지를 엮어 그릇을 만들어 팔며 수백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국가 입장에서는 호적도 없고 세금도 내지 않는 통제 불가능한 유령 인구나 다름없었죠.
세종이 손을 내밀었지만
세종 5년, 1423년. 세종은 화척이라는 멸시 섞인 이름을 없애버리고, 이들에게 백정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로 합니다. 이름을 바꾸고 호적에 올리고 땅을 나눠 줘서, 일반 백성과 섞여 살게 하겠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세종은 진심이었고 구체적인 실행안까지 있었습니다.
그러나 양반들은 이 사람들을 절대 같은 백성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원래 백정과 구분하려고 신백정이라는 말을 새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왕이 "같은 사람이다"라고 했는데, 사회가 "아닌데요"라고 답한 겁니다. 땅을 나눠주라는 지시는 지방 수령들이 대놓고 무시했고, 세종이 이름을 바꾼 지 채 40년도 되지 않아 그 이름은 최고위급 대신이 동료에게 내뱉는 욕설로 전락합니다.
성군이 가장 선한 뜻으로 붙여준 이름이 500년간 가장 모욕적인 호칭이 된 겁니다. 어쩌면 노골적인 차별보다 더 잔인했던 건 그 짧은 희망이었을지 모릅니다. 손을 내밀어 일으켜 세워 놓고는 다시 벼랑 끝으로 밀어버린 꼴이었으니까요.
삶의 모든 순간에 새겨진 격리
백정의 하루는 해가 뜨기도 전에 시작됩니다. 소를 끌고 사람 눈에 안 띄는 외곽으로 숨어 들어가야 했습니다. 소를 끌고 가는 길에 누군가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그 사람은 재수 없는 인간을 만났다며 하루를 망쳤다고 생각했습니다. 해가 중천에 뜰 때쯤이면 손톱 밑에는 기름이 끼어 있고 옷에는 피 냄새가 진동합니다. 사람들은 코를 막으면서도 이들이 파는 고기는 없어서 못 먹었습니다.
아무리 돈이 많아도 비단옷, 두루마기, 갓, 가죽신은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성인 남성임에도 상투를 틀 수 없었고, 대나무 껍질로 엮은 패랭이만 쓸 수 있었습니다. 혼인할 때는 신랑이 소를 타고 장가를 갔고 신부는 널빤지에 실려 시집을 왔습니다. 죽어서도 공동 상여는 쓸 수 없었습니다. 삶의 모든 순간에 이 사람이 백정임이 드러나야 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법전에 적힌 조항이 아니었습니다. 지방 수령이, 이웃이, 길을 지나치는 농민이 저마다 이 차별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았습니다. 그 당연함이 어떤 법보다 오래, 더 깊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혐오하면서 필요로 했다
조선은 살생을 금기시하는 유교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나라에서 소고기를 가장 많이 먹은 사람들은 양반이었습니다. 성균관에서는 나라의 지원 아래 공식적으로 소 도살이 허가됐고, 성균관 재정 자체가 현방 수익에 기대고 있었습니다. 법을 집행해야 할 기관들이 그 법을 어기는 현장에서 돈을 받아 운영됐습니다.
백정이 잡은 소고기는 양반 잔치상에 올랐고, 백정이 만든 버드나무 고리 제품은 온 나라에서 쓰였습니다. 백정 없이는 이 나라의 식탁도 시장도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이 나라는 그들을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했습니다. 가까이 두면 그 사실이 너무 선명하게 보이니, 마을 밖으로, 사람들의 시선 밖으로 멀리 뒀는지도 모릅니다. 혐오하면서 필요로 하고, 필요로 하면서 혐오했습니다.
500년 만에 처음으로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법적으로 폐지됐지만 현실은 달랐습니다. 호적에는 여전히 백정임을 표시했고, 법이 바뀐 뒤 6년이 지나서야 직접 관청을 찾아가 따진 끝에 원하는 모자를 쓸 권리를 겨우 얻어냈습니다.
1923년, 신분제 폐지 29년이 지난 후에도 이학찬은 자녀를 어느 학교에도 보낼 수 없었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 백정의 자식이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명의 항의로 바뀔 일이 아니라면 세상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1923년 4월 24일, 조선형평사가 창립됩니다. 형평사 취지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요 애정은 인류의 양본이라. 고로 우리는 계급을 타파하며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며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도 참다운 인간으로 살고자 한다."
수백 년간 짐승 취급을 받아온 사람들이 처음으로 "우리도 사람이다"라고 선언한 겁니다. 반발도 거셌습니다. 기생, 농민, 노동자처럼 스스로도 차별받던 사람들이 가장 격렬하게 반대했습니다.
자신보다 아래에 누군가가 있어야 자신의 자리가 지켜진다는 생각이 그만큼 깊이 박혀 있었던 겁니다. 그렇게 부딪히고 흔들리면서도 형평운동은 13년을 버텼고, 1930년대에는 호적과 학적부의 백정 신분 표시가 공식적으로 철폐됩니다.
차별이 오래가는 이유
이 차별을 만든 건 누구였을까요? 어느 한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니었습니다. 아무도 나쁜 사람이 되려 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냥 당연한 세상을 살았을 뿐이었죠.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법이 바뀌어도 차별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도 없어서는 안 되면서, 보이지 않도록 만든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가 매일 누리는 편안함의 어느 자리에, 우리가 잘 보지 않으려 하는 누군가가 있지는 않을까요?
차별이 오래가는 건 나쁜 사람이 많아서가 아닙니다. 그 차별 속에서 편안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그 사실을 모른 채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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