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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어떻게 보내셨나요? 아침에 수도꼭지를 틀어 물 한 잔 마셨을 겁니다. 열이 나면 약국에 들러 약을 샀을 겁니다. 아이가 아프면 병원에 데려갔을 겁니다. 너무나 평범한 하루입니다.
그런데 조선 시대 임금 27명의 평균 수명이 46살이었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조선 최고의 음식과 최고의 의원이 24시간 곁을 지켰던 사람들이, 지금 우리 기준으로는 한창 일할 나이에 줄줄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던 왕보다 권력의 그림자에서 살았던 내시가 무려 70세까지 살았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도대체 그 시대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첫 번째 살인자, 매일 마시는 물 한 사발
조선 후기 한양에는 약 20만 명이 살았습니다. 이 거대한 도시 사람들이 밥 짓고 국 끓이고 아이 씻기던 물의 정체를 알면 누구라도 입을 다물지 못할 겁니다. 그 물의 이름은 청계천이었습니다. 단 하나의 개천이 한양 20만 명의 식수원이었습니다.
어느 여름 아침 청계천의 풍경을 그려 보겠습니다. 상류에서는 아낙들이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서는 아이들이 멱을 감았습니다. 같은 물줄기가 흘러내려 중류에 닿으면 소와 말이 목을 축이고 있었습니다. 짐승의 분뇨가 그대로 물에 떨어졌습니다. 더 아래 하류에 이르면 거기서 누군가는 국 끓일 물을 길어 올리고 있었습니다.
물을 끓이면 안전하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다만 끓일 수가 없었던 겁니다. 가난한 집은 밥 지을 땔감조차 빠듯했습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산림 황폐화가 심각해져 땔감값이 천정부지로 뛰었습니다. 끓인 물 한 사발이 사치였던 시절이었습니다.
1760년 영조는 청계천 바닥을 대대적으로 파내는 준천 사업을 명했습니다. 수십만 명의 인부가 동원된 큰 공사였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습니다. 세균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대, 개천을 아무리 깊이 파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물을 그대로 떠마셨습니다.
두 번째 살인자, 마마
1444년 겨울, 경복궁은 울음소리로 가득 찼습니다. 세종대왕이 가장 아끼던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이 20살 나이에 세상을 떴기 때문입니다. 사인은 창진, 오늘날 우리가 천연두라 부르는 그 병이었습니다.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년 뒤인 1445년, 세종은 또 한 번 같은 통곡을 들어야 했습니다.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마저 같은 병으로 19살에 숨을 거뒀습니다. 훈민정음을 만든 그 위대한 군주가 두 아들의 죽음 앞에서는 그저 한 사람의 아버지였습니다.
조선 사람들은 이 병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부른 이름이 마마였습니다. 마마는 본래 왕실의 최고 존칭입니다. 병을 임금처럼, 신처럼 떠받들어 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못한 겁니다. 천연두의 치사율은 20%에서 30%, 어린아이는 더 높았습니다. 운 좋게 살아남아도 평생 곰보 자국이 남았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곰보 없는 매끈한 얼굴이 혼인의 한 조건으로 꼽힐 정도였으니, 마을에 가면 얼굴에 흉터가 남은 사람이 절반은 됐던 겁니다.
천연두만이 아니었습니다. 홍역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약 30년 주기로 홍역 대유행이 반복됐습니다. 한 세대마다 한 번씩 마을의 아이들이 무더기로 사라진 겁니다. 그리고 1821년 순조 21년, 평양에서 정체불명의 병이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갑자기 심한 설사와 구토를 일으키더니 몇 시간 만에 새파랗게 질려 숨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콜레라라 부르는 그 병이었습니다. 두 달 뒤 한양에 도달한 이 병은 이듬해까지 전국을 휩쓸며 수십만 명을 앗아갔습니다.
세 번째 살인자, 하늘이 내린 재앙
1670년, 현종 11년. 조선 인구의 약 5분의 1이 한 해 사이에 사라졌습니다. 당시 인구가 약 516만 명, 그중 100만 명이 굶주림과 역병으로 세상을 떴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서울시민 다섯 명 중 한 명이 한 해에 사라진 것과 같은 충격입니다. 우리는 이 비극을 경신대기근이라 부릅니다.
봄 가뭄, 여름 태풍, 가을 메뚜기 떼, 그 뒤를 따라온 역병. 한 가지 재난도 견디기 힘든 백성에게 다섯 가지가 한꺼번에 쏟아진 겁니다. 사람들은 산으로 올라가 풀뿌리를 캐고 나뭇껍질을 벗겨 삶아 먹었습니다. 실록에는 그다음 풍경이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굶어 죽은 시체가 즐비해 서로 마주보고 있을 정도였다고. 그리고 끝내 실록의 붓끝은 참아 적기 힘든 네 글자에 이르렀습니다. 인상식, 사람이 사람을 먹었다는 뜻입니다.
이 비극이 한 번으로 끝났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겁니다. 25년이 흐른 1695년, 또다시 같은 일이 벌어집니다. 을병대기근입니다. 5년 동안 흉년과 역병이 끊이지 않았고, 두 차례 대기근의 사망자를 합하면 약 240만 명. 조선 인구의 거의 절반 가까이가 두 번의 큰 굶주림 속에 사라진 셈입니다.
대기근이 없는 평년에도 봄은 잔인한 계절이었습니다. 음력 4월과 5월, 작년 가을에 거둔 살은 이미 바닥 났고 보리는 아직 여물지 않은 그 시기를 사람들은 보리고개라 불렀습니다. 그 고개를 넘지 못하고 쓰러지는 사람이 해마다 속출했습니다.
네 번째 살인자, 출산
조선 왕실에서는 출산 약 석 달 전부터 산실청이라는 임시 분만 전담 기구가 설치되었습니다. 네 명의 의관이 임신을 확인하면 곧바로 분만실이 마련되었고 산파와 의녀가 모였습니다. 그 시대 기준으로 상상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시스템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죽음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장경왕후, 인현왕후, 효의왕후 모두 출산 합병증이나 산후 질환으로 세상을 떠난 왕비들입니다.
조선 최상위 계층 여성 가운데 약 10%가 출산 직후 사망했다는 연구가 있습니다. 출생아 10만 명당 약 3,000명 꼴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모성 사망비가 10만 명당 여덟 명대라는 점을 생각하면, 숫자만으로도 가슴이 서늘해집니다.
가장 흔한 사인은 산욕열이었습니다. 출산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통해 세균이 침입해 일으키는 감염이었습니다. 항생제가 없는 조선에서는 손 쓸 방법이 없었습니다. 손 한 번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 살릴 수 있었던 어머니들이, 그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로 떠나갔습니다.
겨우 무사히 태어난 아기에게도 시련은 끝이 아니었습니다. 첫 겨울, 저체온증. 첫 여름, 설사병. 부실한 영양에 자라지 못한 몸은 다음 병을 견디지 못했습니다. 왕실 자녀의 다섯 살 이전 사망률은 30%에서 40%까지로 추정됩니다. 철종은 자녀를 12명 두었는데 그중 11명이 갓난아이 시절 세상을 떴고, 단 한 명 딸 하나만이 14살까지 살아남았습니다. 임금의 자식이 그러했습니다.
그래서 조선 사람들은 돌잔치를 그토록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 풍성한 잔치 자리에는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가 깔려 있었습니다. 이 아이가 살아남았다. 그 한 문장에 담긴 안도와 감사가 오늘날 우리가 식장을 빌리고 사진을 남기는 돌잔치 문화의 진짜 뿌리입니다.
다섯 번째 살인자, 보이지 않는 세균
1659년 5월, 효종이 머리에 난 작은 종기 때문에 의관을 불렀습니다. 침을 잘 놓는다고 소문이 자자한 신가귀라는 명의였습니다. 그런데 신가귀에게는 한 가지 비밀이 있었습니다.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수전증을 앓고 있었던 겁니다. 그 떨리는 손이 침을 잘못 찔러 혈관을 건드렸습니다. 출혈이 시작되었고 멈추지 않았습니다. 효종은 그날 곧바로 숨을 거뒀습니다. 발병에서 사망까지 단 7일에서 8일.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공식적으로 의료 사고로 사망한 유일한 임금이었습니다.
1800년 6월, 정조의 등에 작은 부스럼이 났습니다. 조선 개혁의 상징, 수많은 백성이 희망을 걸었던 그 군주입니다. 그 부스럼이 점점 커졌고, 발병 24일 만에 정조는 세상을 떴습니다. 종기에서 시작된 세균이 혈류를 타고 온몸으로 퍼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날이라면 항생제 며칠이면 잡혔을 그 감염 앞에서, 한 나라의 군주가 그렇게 무력했습니다.
가장 강한 권력자들조차 보이지 않는 세균과 만성 질환 앞에서는 한없이 초라했습니다. 왕이 이 정도였다면 백성들은 어땠을까요. 일하다 베인 작은 상처가 곪아 올라 며칠 만에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이가 아파도 뽑아 줄 치과가 없었고 다리가 부러져도 제대로 맞춰 줄 의사가 없었습니다.
평범한 하루가 기적인 이유
조선 사람들의 짧은 수명은 한 가지 원인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오염된 식수, 통제되지 않는 전염병, 주기적 기근, 위험한 출산, 반복되는 전쟁, 만성 영양 결핍, 그리고 결정적으로 세균에 대한 무지와 항생제와 백신과 소독과 수액의 부재. 이 모든 것이 겹겹이 쌓여 한 사람의 인생을 짧게 만든 겁니다.
오늘날 한국인의 기대 수명은 83세를 넘어섰습니다. 그것은 단지 의술의 발전만으로 이뤄진 일이 아닙니다. 상하수도, 예방접종, 항생제, 식량 안보, 주거 위생, 사회보장이라는 거대한 인프라가 함께 갖춰진 결과입니다.
세종이 두 아들을 같은 병으로 잃었던 1444년에서 우리는 600년이 채 되지 않는 시간을 지나왔습니다. 수도꼭지에서 깨끗한 물이 나오는 일, 아이가 무사히 첫 돌을 맞는 일, 작은 상처에 연고 한 번 발라 끝내는 일. 우리에게는 너무나 평범한 이 하루하루가 사실은 인류 역사상 매우 예외적이고 귀한 조건 위에 서 있습니다.
조선의 수많은 짧은 삶들이 우리에게 조용히 알려주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오늘 하루 별일 없이 지나갔다면, 그 평범함 자체가 얼마나 큰 축복인지 한 번쯤 곱씹어 보시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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